한국영화의 태동과 시대적 발전 그리고 한국영화 열풍에 대한 내용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1990년대의 한국영화
1990년대의 중요한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1998년 50년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이다. 감시와 통제의 지난 7~80년대 상황 속에서 이런 역사적 사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던가.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연례없는 호황을 누릴 수가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한 대기업의 영화업 진출은 지난 80년대 말 UIP 직배 파문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한국 영화계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시장의 호황과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소프트웨어의 필요성이 절실해 졌고 대기업들은 다량의 소프트웨어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단관 경영의 극장가가 복합 상영 시스템으로 대형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대기업 자본 유입의 영향이 크다.
신인 감독의 대거 등장 또한 90년대의 중요한 특징인데, 대기업에 종속된 자본에 의해 상업적 논리에 입각한 감독 데뷔가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입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장르적 상상력에 대한 경도는 두 가지로 원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한국영화의 산업추세이며 다른 하나는 전 세대와는 달리 영화적 세계를 충분히 받고 영화 연출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세대의 출연이다. 이때부터 허구의 구경거리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끽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스타일에 대한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반면 잡종장르에 나타난 빈약한 상상력 또한 나아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산업이 정체되어 있던 까닭에 산업체계와 필연적으로 맞물리게 되어있는 장르적 표현 관습이 취약했던 한국 영화는 비로소 장르의 규칙과 긴장을 이루는 관습을 축적시킬 기미가 보인다. 또한 90년대는 영화가 문화로서 확실하게 정착되는 지점이기도 했는데 국제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제의 개최 또한 영상문화의 폭을 넓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는 서울 중심의 집중을 해소하기위해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인한 문화의 분산화 덕택이다. 1996년 개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중심의 예술영화를 선보이며 영화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의 사고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98년에는 3회를 맞이하게 된다. 1997년에 개막된 부천 판타스틱 국제 영화제 역시 오락영화만의 축제를 표방하며 세계 각국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불어 닥치기 시작한 IMF 경제 한파로 인해 다시금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어 영화제작 환경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로 인하여 다수의 기업들이 영화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영화 산업은 내용면에서나 산업적인 면에서 발전을 늦추지 않았다.
맺음말
한국 영화산업은 지난 10년간 기적적으로 성장했다. 90년대 초 20%에 불과했던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올해 말 50%를 돌파하여 상징적인 분기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한국 영화계의 제작비 급상승과 상영관 확보 경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영화산업은 스크린 쿼터에 의해 보호 받으면서 장인 정신으로 충만해지며, 불과 10년만에 다양한 제작과 탁월한 기술 능력을 갖춘 효율적 조직으로 변신했고, 따라서 한국 영화가 아시아 지역에서 점점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 영화 제작자들이 다른 아시아의 영화 제작 사업으로부터 더 많은 유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90년대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은 그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영화내용 그 자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영화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국영화가 엄청 재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시나리오가 좋아졌다는 얘기다. 헐리우드에서는 한편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평균 65회 정도의 시나리오를 수정한다고 들었다. '친구'는 시나리오 작업기간만 1년 2개월이 걸렸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들의 물리적 노력엔 아직 못미치지만 보편적으로 시나리오에 들이는 공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차별화된 기획도 빼놓을 수 없다. 독특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생산성 높은 경쟁력을 만들어냄으로써 영화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할리우드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특수효과, 컴퓨터그래픽, 오픈세트도 이제는 그들만으 것이 아니다. 프로페셔널한 도전의식과 열정이 새로운 기획의 두려움을 희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정서도 한몫을 했다. 같은 날 성공적으로 개봉된 외화와 방화의 최종 흥행 기록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흥행에 성공한 외화라 할지라도 그 생명력은 비슷한 경의 방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퍼져나가는 입소문이 외화와 한국영화가 현저히 다른 것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정서이고 공감대인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정서는 한껏 세련되고 편안해진 대형 멀티플렉스에 힘입어 점차적으로 두꺼운 관객층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밖에도 우수인력의 충무로 입성 과감한 양질의 금융자본 유입, 전국 배급력 강화, 투명화 회계 등의 여러 요인이 한국영화의 풍성한 발전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도 한국영화산업이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는 이미 검증된 바라 할 수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4일까지 244만 8700명의 관객(서울기준)을 동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영화 '쉬리'의 기록(244만 8000명)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 기록은 쉬리뿐만 아니라 외국영화를 포함한 그동안의 영화 중 최대관격 동원 기록이다. 영화계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문화와 정보의 세기라는 21세기와 더불어 한국 영화가 중흥기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99년 쉬리가 몰고 온 한국영화바람을 공동경비구역 JSA가 뒤를 이으면서 그동안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 숨을 죽이고 있던 한국영화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이 덕택에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99년의 35.9%에 이어 2000년 33% 등 2년 연속 30%대를 넘어섰다. 영화제작 편수도 99년의 43편에서 지난해엔 60여편에 이르렀고 수출도 303만 5360달러에서 700만 달러로 급성장했다. 한국영화의 이같은 성장세는 영화 '춘향뎐'이 지난해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것을 비롯해 국제영화제에 자그마치 370여회나 출품돼 한국영화 수출단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동안 잘받아야 10만 달러 선에서 맴돌던 한국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일본에 200만 달러에 수출될 만큼 가치를 높였고 수출대상국도 99년 11개국에서 24개국으로 확대되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중흥기에 들어선 것은 영화산업이 고부가가치산업이란 인식의 확신과 함께 소재의 다양화, 젊은 감독들의 대거 등장, 탄탄한 배급망의 구축 등이 밑받침이 됐다.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가 하나같이 남북화해 무드 속에서 그동안 터부시돼왔던 남북관계를 다뤘다는 점과 재벌 등이 참여한 배급회사가 이를 뒷받침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이 같은 가능성을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영화인들의 치밀한 계획과 노력이 요구된다. 몇 년 사이 한국영화가 급성장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할리우드영화에다 새로 등장한 일본영화공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영화는 초창기 공세에서 주춤거려 현재 7% 정도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나 그 잠재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한국 영화의 독특한 '맛'을 살려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를 흉내 내 대작주의 블록버스터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국제화시대에 걸맞게 제작 배급 출연진 등의 국경을 없애는 것도 한국영화바람을 일과성이 아닌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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