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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한국영화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한국영화 열풍2(한국영화 70년대 이후의 경향)

by 엘리네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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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한국영화의 시대적 발전 및 한국영화 열풍에 대해 작성해보겠다.

 

 

한국영화 70년대 이후의 경향

 

1. 1970년대(1970~1979)

70년대의 한국 영화계는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침체되고 암울한 시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TV의 전국적인 보급과 함께 유신 정국 하에서의 가혹한 검열로 인한 표현의 제한은 한국 영화를 불황 속에 내던졌으며 영화의 질적 하락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1972년 들어선 유신 정부는 73년 2월 16일. 제4차 영화법 개정을 시행한다. 영화사 등록 여건을 한층 엄격하게 규정하여 은연중에 활동하던 개인 영화업자들의 움직임을 막아버렸으며, 1년에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게 하는 의무 편수 조항을 적용했다. 물론 모든 영화는 유신 이념을 구현해야 했으며 초기 법령과 마찬가지로 20개 영화사는 독과점 형태로 영화 시장을 나눠 먹기식으로 주물러 가며 다른 세력을 키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서로 견제, 단합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외화 수입은 한국 영화 육성이라는 이유 하에 국산 영화 제작의 1/3을 넘지 않고 상영일수는 전체 상영일의 2/3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자연히 1년에 약 30편을 넘지 않는 외화는 희소가치 때문에 흥행은 보장되었고 외화 수입 쿼터를 싸고 계속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또한 영화의 검열 기준을 강화하는 한편 합작 영화의 기준을 명시하여 위장 합작영화 방지와 그밖에 배급 업무를 담당하는 '영화배급협회'를 설치 운영케 했다. 검열은 긴급 조치에 위배되는 것은 가차 없이 잘라내었는데, 사전 대본심의와 실사 심의가 공존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 시대적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타난 돌파구가 호스티스 물 등이었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에 이은 호스티스 물의 범람은 삶에 대한 냉소, 육체적인 자유 추구, 여성의 상품화라는 소비성 강한 사회 풍조가 크게 대두된 것이다.

우수 영화를 만들어 스크린 쿼터의 보상을 받는 제도는 60년대에 이어 문예영화를 양산하는 지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는 사라지게 되었고 사회의식이나 작가의 비판은 당국의 강력한 통제하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수 영화는 국책 영화'라는 의식의 팽배로 대부분의 관객이 신파 물, 호스티스 물에만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 여전히 '국난을 극복한 위인'을 다룬 영화나 독립투사의 활약, 반공 영화, 계몽 영화들이 우수 영화로 지목되고 보상이 주어져 영화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계는 산업화하지 못했고 소수의 영화 자산가를 만들어 내면서 영화감독들에게는 박탈감을 안기고 영화에는 질적인 퇴보를 가져왔던 것이다.

 

2. 1980년대 (1980~1989)

1980년대의 한국 영화는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환기는 한국영화 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의 하나다. 그 중요한 개혁의 골자는 70년대 영화에 대한 정책적 통제에서 80년대의 개장 정책으로의 전환에 의한 영화 제작의 자유화라고 할 수 있으며 커다란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1979년에 제4 공화국의 막이 내리고 1980년에는 제5 공화국이 출범하였으며 이것은 곧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전환, 즉 통제적인 폐쇄사회로부터 폭넓은 개방적인 민주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양 시대 사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그 변혁은 현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폐쇄로부터 개방으로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영화 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몰고 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영화법의 개정이었다. 지난 70년대에 줄곧 정부가 연례의 영화 시책에서 주장했던 유신 이념의 구현이라는 특정한 정책 명령이 사라지고 영화 옛 굴의 향상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영화 검열에 있어서 크게 완화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서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70년대 영화와는 그 미학적 특징을 현저하게 달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의 원인이 되는 것을 70년대의 폐쇄적인 영화 환경이 80년대의 보다 개방적인 영화 환경으로 전환한 데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영화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주어지는 소재로서의 개방과 성장의 사회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의 요인으로서의 영화정책이 지양됨으로써 80년대 영화의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게 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한국 영화는 본래의 작가적인 눈으로 정직하게 생생한 소재를 선택하고 표현의 영역을 넓혀 한국영화가 소생할 가능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리얼리즘의 회복과 진지한 작품의 제작을 그 주조로 하게 된 데서 깊은 뜻을 갖게 한다. 한편 매우 실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점도 80년대 영화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은 70년대에 그 작가 의욕이 억제되었던 일견의 중견 감독들과 80년대에 데뷔한 신인감독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의 진지한 눈으로 한국사회의 현실이 안고 있는 가난한 서민층의 생활이나 억압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인간 생활의 모순과 비참함을 그려냈다. 물론 80년대의 사회 현실은 5~60년대의 처참한 전후 현실과는 다르다. 한국인의 GNP가 불과 100달러였던 1950년대에서 2000달러가 넘게 죈 거대한 산업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괄목할 만큼 달라진 사회적 변화,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오락 영화는 다시 멜로드라마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에로티시즘이 그 주조가 되었다. 이 것도 역시 영화 검열이 완화되면서 나타난 경향이다. 70년대에 있어서는 남녀 간의 농도 짙은 행위 장면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 80년대의 영화 장르는 사극 영화와 종교영화의 새로운 대두가 주목되었다. 한편 활극과 희극 영화들이 잠시 살아났다가 쇠퇴했으며 70년대까지 정책적인 장르였던 군사 영화, 반공영화, 계몽영화 등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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