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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한국영화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한국영화 열풍1 (시대별 한국 영화사)

by 엘리네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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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태동과 발전과 한국영화 열풍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머리글

 

근래 한국영화의 붐이 일고 있다. 프랑스 르몽드 지는 1990년 이후 근 10년간 한국영화가 기적적으로 성장했다고 분석할 정도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국 근현대사의 수강생으로서 현재 한국영화의 붐을 단편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즉, 한국영화 태동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가 겪어온 과정을 정리해 봄으로써, 한국영화가 현재와 같은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원동력을 살펴볼 것이다. 단 지금과 같은 한국영화의 번창을 몇 가지 원인으로 고정화시키지는 않겠다. 몇 가지 요인이나 여건들이 한국 영화발전으로 귀결되는 단선적인 인과성을 갖는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영화의 발전 경로와 당시 시대상과의 맥락을 고찰해보고 90년대 이후 나타나고 있는 한국영화의 번창을 몇 가지 요인으로 단순화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 영화사 (개화기~1950년대)

 

영화가 당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근대사와 같이 시작한 한국 영화는 일반 민중의 삶은 물론, 빈민층, 지배층까지 전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했다. 구조적 요소로서 영화는 작품 속에 내재된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영화 매체가 가지는 경제적 의미, 그리고 영화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까지, 영화는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개화기부터 해방, 한국전쟁까지 한국 근대사는 격동적인 사회, 정치,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여기 한국 영화사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영화 도입기 ~ 1920

① 1800년대 말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영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언제였을까. 기록에 의하면 1899년 한국을 여행하던 미국인 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Elias Burston Homes)가 고종황제 앞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상영은 고종황제를 비롯한 한정된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인 상영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보다 몇 년이 더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 신기한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② 1900년대 초반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상영 영화)

1903년 6월 23일 자 황성신문에 실린 광고를 통해 보면, 동대문의 한성 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단편영화를 상영했었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유럽이나 미국, 서울의 풍경을 찍은 단편 필름이었으며,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되는 이 새로운 구경거리에 매일 저녁 1천 여명의 관객이 몰리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20여만 명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첫 대중 상영에서 성공을 거두자 한성 전기회사 마당은 "동대문 활동 사진소"로 불리며 점차 관람시설도 갖추어 나가게 되었고 1907 년년에 이르러서는 "광무대"라는 이름의 정식 공연장으로 점차 서울의 명물이 되어갔다.

 

③ 1910년 이후 ~ (영화 수준의 비약적 향상)

1910년 이후 한국에 들어온 양화들은 지금 들어봐도 꽤나 수준이 있는 외화들로 그 당시 관객의 영화문화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가늠할 수 있겠다. "쿼바디스", "엘리자베스 여왕", "지바고", "부활", "잔다크" 등의 문예물, "인토 레 란스", "호반의 처녀" 등 실험극이 상영되었다. 일제하에서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영화를 통해서 선진제국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오락성과 예술성을 향유했고 자유와 해방의 바람으로 한국예술의 성장의 꿈을 키웠으리라 본다면 신연극, 신문학은 물론 무용, 음악, 미술 등 영화 문화로부터 받은 충격의 바람은 한국의 젊은 예술인 등을 자극하고 깨우치게 하였다.

 

2) 한국 영화 태동기 1921 ~ 1945

① 1920년대 ~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

한일 합방과 함께 나라의 국운은 점차로 기울어갔지만 개방된 세계에 관한 호기심과 근대화된 서구 신문물에 대한 갈증은 점차 커가게 되었다. 이러한 중에 스크린 위에서 만나는 전혀 새로운 풍경과 그 경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와 의심의 해방구가 되었을 것이다. 활동사진의 관객이 점차로 늘어나면서, 외국의 필름만을 그대로 상영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 힘으로 촬영한 영화에 대한 욕구가 커져가게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영화로서의 면모를 갖춘 우리 영화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3년에 들어서 "서선 키네마"라는 영화사의 작품인 "국경"이 제작되면서이다. 당시 5만 원의 제작비를 들여서 한국과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화 한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는 이 영화는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영 하루 만에 종영하게 되었다.

 

②1926년 ~ 1930년

우리나라에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초기 1926년에서 1935년 동안은 흑백 무성영화의 전성기, 황금기였다. 그중 1926년 9월에 발표된 나운규의 "아리랑"은 한국 영화의 전환기를 마련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민족적 사실주의 영화의 대두라고 평가되는 이 영화는 또한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서 당시 우리 정서에 커 다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한편으로는 태동하는 한국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자극제가 되었다.

 

③1930년대 ~ (발성 영화, 계몽 영화의 대두와 침체)

30년대의 한국 영화계는 내외정세의 불안한 요인과 더불어 일제 탄압의 강화로 불황에 빠지게 된다. 나운규의 "금강 한", "남편은 경비대로" 등 저속하고 친일적인 영화 제작의 참여는 조선인과 영화인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어 나운규 자신의 좌절과 방황은 물론이요 한국 영화계의 앞날을 불안하게 했다. 나운규의 작품 "아리랑 후편", "개화당 이문", "강 건너 마을", "그림자" 등은 그의 민족적 열정이 순화되어 "사나이" 이후의 역사적, 사회적 계몽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이어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변사의 능력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했던 무성영화에서 한국영화는 발성영화로 나아가게 된다.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년 발표된 <춘향전>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되는 발성영화는 자본과 경험에 미숙하고 영세한 당시 영화계에 있어서 큰 부담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제작편수와 내용적인 변에 있어서 오히려 위축되는 결과가 되었다.

 

④1940년 ~ 1945년 (한국 영화의 암흑기)

일제는 37년 <만주 영화법>을 제정하여 만주국의 영화 제작, 수출입, 배급과 상영을 일원화하였고 39년에는 일본 문부성에 영화과를 신설한 후 <일본 영화법>을 제정하고 40년 <조선영 화령>을 공포하기 1년 전부터 내선일체와 식민지 침략전쟁에 비협조적인 영화인들을 내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38년에 만들어진 "군용 열차"는 경향파 영화평론가였던 서광계의 변절로 일지 사변에 편승하여 제작된 군 국어용 영화의 시작이었다. 41년 조선영화제작협회와 조선영화배급협회의 결성은 42년 조선영화제작자를 축출시킨 조선영화 주식회사 발족으로 한국영화의 제작, 배급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한국영화의 암흑기는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일제하의 조선총독부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황국신민으로서 일제에 협력할 것을 선동 교화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3) 한국 영화 부활 시대 1945 ~ 1955

 

① 1945년 ~ 1950년 (한국 영화 르네상스)

일제 식민지 하에서 해방된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질서를 찾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의 부활을 맞게 된다. 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영화는 더욱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예술적 의도가 돋보이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1946년 미군정청이 공포한 법령 제68호와 115호는 새로운 영화 법령으로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 영화계의 활동을 제재하였다. 그 후 미군정청의 뉴스영화 제작 의뢰를 맡아 영화 제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 외의 광복 영화로써 애국투사, 순교자, 의사의 전기와 투쟁사를 통해서 민족해방을 위한 겨레의 아픔과 수난을 그린 영화가 만들어졌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광복 영화의 열풍은 수그러지고 작품 경향의 다양성과 함께 반공영화를 비롯한 차분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등장했다.

 

②1950년 ~ 1955년 (한국 영화 동란기)

한국전쟁이 발발되면서 한국 영화계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월북 납북된 영화인과 함께 기자재 유실이 심했다. 남아있는 영화인마저도 군 영화 제작활동에 투입되었다. 리버티 뉴스 "502부대" 국방뉴스와 백만인의 별 "부산 정훈국" 대한뉴스 "공보처" 공군 촬영대 등 전시의 한국영화는 일반 극영화보다 기록영화 제작에 혼신을 다했다.

작품 경향은 전후방에 걸친 시국적인 계몽영화와 전시 사회를 배경으로 범죄를 다룬 서스펜스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밖에 기록영화의 활성화는 혼란기 한국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6.25 전쟁 이후 잠시 주춤했던 우리 영화계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제2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우리 영화계는 과거의 영세한 수준의 모습을 탈피해서 어느 정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와 기자재를 마련하게 되었고, 새로운 영화인력들을 갖추어 활력 있는 모습으로 설 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전란 이후 신축된 극장과 마을 곳곳에 가설극장을 통해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관심에 힘입어 1959년에는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한 해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어서는 활황을 누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한국영화는 더욱 일반 민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한창 인기를 누렸던 멜로드라마는 당시 서민층의 가정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생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중 오락의 대표적 매체로서 군림하게 된 영화의 이런 모습은 후반에 들면서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50년대 후반은 20년대 후반처럼 한국영화의 제2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1955년에 개봉된 이규환의 "춘향전"과 한영모의 "자유부인"의 흥행성공과 화젯거리는 한국영화의 중흥의 횃불을 밝혔다. 보수적 윤이를 다룬 역사극 "춘향전"과 전후의 혼란 속에서 새롭게 직면한 사회의 만연된 풍조를 그린 "자유부인"은 우리의 윤리의식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 시대의 민중 오락의 갈증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 문예영화들도 60년대 중반부터 유행했다. 이성구의 <젊은 표정(1960)>, 이만희의 <흑맥(1965)><만추(1966)> 등이 그것이다. 60년대 문예영화의 붐이 소재 부족의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무분별한 소설의 영상화가 빚어낸 어설픈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었지만 개성 있는 작가군의 출현과 활발한 영화 제작은 모처럼 한국영화에 전성기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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