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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 문학에 대한 전망 2, 대중문학의 대약진

엘리네 2021. 11. 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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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 문학에 대한 전망 1편에 이어 2편인 대중 문학의 대약진과 우리 문학에 대한 소망과 전망에 대해 정리해보겠다.

 

 

대중문학의 대약진

 

지난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문학을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으로 나누어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 인식은 차츰 사라질 것이다. 아주 옛날에도 그렇게 하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인의 소원은 가르치는 일, 또는 쾌락을 주는 일, 또는 그 둘을 아울러 하는 일"이라고 말했듯이 문학은 원래 재미(오락성)와 교윤(작품성) 모두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자에 치우치면 대중문학, 후자에 치우치면 순수문학이라고 했지만 그 경계가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다.

90년대에 들어 문학권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사이버 문학과 판타지 소설을 포함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대중에 어필한 작품을 출간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그다지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작품성과 상업성 두 가지를 아울러 갖춘 잘 품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이 '잘 팔린다'는 사실을 놓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독자의 구미를 잘 간파한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은 출판계의 만성적인 불황을 타개하려는 몸부림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리라, 그림 독자층에 문제가 있는가?

이점에 대해서도 선뜻 비난의 화살을 꺼내 들 수는 없다. 활자매체 위축의 시대에 그나마 문학 독자층이 있는데 이런 작품이 훌륭하니 읽어야 하고 이런 작품은 저급하니 읽지 말자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자율적인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위해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상업주의로 치달은 작품이 독자의 구미를 맞추었다는 이유로 옹호된다면 문학 그 자체가 존립 기반을 잃을지도 모른다. '잘 팔린 책=좋은 책, 안 팔린 책=안 좋은 책'이라는 등식은 너무나 위험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평론가의 안목이 필요하다. 누가 문학권력을 갖고 있느냐를 두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베스트셀러의 사회적 의미를 밝혀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는 그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 이 작품이 왜 좋은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의무이고, 왜 좋지 않은가를 밝히는 것은 권리이다. 우리 문단의 한 가지 병폐는 특정 문예지나 문학 집단의 간판 격 작가, 시인에 대해서는 그 가 아무리 태작을 내더라도 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때는 독자가 비판을 해야 한다. 분별력을 갖춘 독자가 지금같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우리 문화의 성숙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날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보다 월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를 잘 보존하고 보살피려는 성숙한 국민의식이다.

애매한 입장이긴 하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사람과 대중문학 작가가 서로 적대적인 자리에서 비난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대중의 공감대에 밀착하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서는 문학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이 오로지 재미 추구에만 나서서 비판적 통찰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거나 반성적 사유를 유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품'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에서도 수준 높은 대중문학이 나와야 한다. 문제는 베스트셀러 순위가 10 계명 같은 금과옥조이며, 그 베스트셀러 목록을 제공하는 독자가 도서출판 시장의 신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많이 팔린 소설집은 좋은 소설집이고 안 팔린 소설집은 신통치 않은 소설집인가? 시집도 베스트셀러 시집이 좋은 시집이고 시단의 인정을 받는 시인이 낸, 영 안 팔리는 시집은 별 볼일 없는 시집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일을 마다할 작가는 없을 테지만 문학을 자본주의의 논리로만 따질 때, 우리 문학의 수준은 아래로만 추락할 것이다.

 

 

우리 문학에 대한 전망과 소망

 

2021년에도 대중문학은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독자는 진지한 것이나 심오한 것에는 사실상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재미있는 것이나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을 찾아서 읽고 있다. 소설에 대한 전망은 일단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밝다. 국내 작가가 쓰고 있는 대중소설은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싶은데, 아마 내년에도 이런 작품들이 도서 시장에서 새롭게 단장하여 선을 보일 것이다.

<아버지>, <가시고기> 같은 최루성 소설, <퇴마록>, <드래곤라자>, <바람의 마도사> 같은 판타지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황태자비 납치 사건>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소설, <국화꽃 향기>, <눈물꽃> 같은 연애소설, <상도>, <태양인 이제마> 같은 역사소설의 변종들, 신문 연재소설에서 시작된 한국의 대중문학은 21세기에 들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베스트셀러 작가 곁에는 고군분투하는 순수문학 진영의 작가들이 있었다. 요 근래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창작집을 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확실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 가운데 주목을 요하는 작가는 다음과 같다. 김연수와 천운영의 문제의식, 한창훈과 전성태의 진지함, 하성란과 한강의 한결같음, 성석제와 김종광의 발랄함, 이혜경과 박청호의 성실함에 큰 기대를 걸고 싶다. 방금 언급한 10명 작가의 활약에 대해 기대를 가짐과 아울러 공선옥, 구효서, 박상우, 윤대녕, 이순원, 이승우, 전경린, 정영문, 정찬, 최인석이 신작을 발표할 작품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자. 그런데 내가 아는 위대한 문학인 사람은 없다. 그저 고뇌에 찬 삶을 살면서도 문학 하나에 목을 매고서 최선을 다해 쓰고 또 쓴 사람의 이름을 나는 기억하고 있고, 그들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백과 두보, 보들레르와 랭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이상과 김유정, 이육사와 윤동주.

문학을 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은 작품 자체에 있어야 한다. 문학을 하면서 맛보는 괴로운 또한 내가 쓴 '못난'작품 그 자체에 있어야 한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문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 쓸 일이다. 판매 부수에, 평론가의 상찬에, 매스컴의 부추김에 완전히 초탈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서 글을 쓰면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작품이고, 그것을 선별하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 문예지 편집자가 문학평론가가 되어야 한다. 작품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문학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한 자기모멸과 학대가 없는 큰 문학을 이룰 수 없다는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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